제주부씨유래

제주부씨유래

you.jpg탐라 개국설화에 의하면 시조 부을나(夫乙那)는 탐라(耽羅) 한라산(漢拏山) 북쪽 모흥혈(毛興穴)에 솟아 나온 세 신인(神人) 중의 한명이다.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공주(公主)와 오곡(五穀)의 종자(種子)와 6축(六畜)이 들어 있었다. 세 신인(神人)은 세 공주(公主)와 각각 결혼하여  배필(配匹)로 삼고, 활을 쏘아 화살이 닿는 곳을 양을나(良乙那) 일도(一徒), 고을나(高乙那) 이도(二徒), 부을나(夫乙那) 삼도(三徒)에 생활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三神人)이 땅에서 솟아나니 맏이를 양을나(良乙那), 버금을 고을나(高乙那),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하였다. 삼신인(三神人)은 거친 들판을 돌아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處女) 3인 및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 씨앗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에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삼왕녀(三王女)를 낳고 이르되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인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配匹)이 없다 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삼공주(三公主)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配匹)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하시옵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 세 신인(神人)은 나이 차례로 나누어 배필(配匹)을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정하니 양을나(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고을나(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부을나(夫乙那)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 한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성종15년(1484) 간행되어 장왈양(長曰良)이라 하고 장위양설(長爲良說)이 굳어졌으며, 이후에도 살펴보면 효종 4년(1654)에 이원진(李元鎭) 목사(牧使)도 삼성혈조(三姓穴條)에 양고부(良高夫)라고 썼고, 숙종 29년(1703)에 이형상(李衡祥)목사(牧使) 역시 삼성사 상량문(三姓祠 上樑門)에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三姓神人) 강생(降生)의 사적 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한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었다. 왕조실록(王朝實錄) 42~P.163에 의하면 영조5년(1771)에 고한준(高漢俊)등이 주상(主上)께 주청(奏請)하는 상소문에도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또한 이병도(李丙燾)저서의 한국사(韓國史)에도 양고부(良高夫)요, 김태능(金泰能)저의 제주도사논고(濟州島史論攷)에도 양고부(良高夫)라 했으며,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 한국사대사전 등에도 양고부(良高夫)라고 기록하였으며, 현용준(玄容駿)저 제주도신기(濟州島神記)에도 양고부(良高夫)라 수록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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